[(돌봄)]레터투레터 8. 기억이라는 선물 (8.11, 혜성)

2021-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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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ie Spratt
긴 산책과 모래놀이라니! 저는 온유가 정말 좋은 순간들을 쌓고 있는 것 같은데요. 물론 휴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있어 어른으로서 온유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엄마와 함께 알찬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입니다. 단지 가은씨만을 떠올리면 절대 쉽지 않은 시간일 것 같아 조금 걱정이 됩니다. 육아라는 수행의 길 위에서 빛나는 것을 찾으시길 마음으로 바랍니다…




'평범한 어른이 된 지금 돌이켜보면

특별할 것 없던 어린 시절 기억들은 하나의 성벽이 되어 

저의 내밀한 핵심을 지켜주는 것 같아요.'


저는 큰 아파트 단지에서 자란 아파트 키드임에도 불구하고, 인접했던 뒷산에 많이 오르던 아이였습니다. 팔다리에 늘 긁히고 멍든 상처가 많아 여자아이가 어쩌려고 이러느냐고 어른들이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부모님이 나름대로 최고의 교육을 제공했음에도 제 유년기를 기른 것은 뒷산과 놀이터였지, 학교나 학원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산을 뛰어다니며 매미 껍데기를 모으고, 비비탄을 쏘고 다녔어요. 장마철엔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우비만 입고 혼자서 물웅덩이를 찾아다니며 발을 굴렀습니다. 빛바래고 가물가물한 그 시절 기억들은 지금까지도 저에게 큰 보물이지만, 자라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생각하면 딱히 큰 성취는 없는 것 같기도 해요. 그때 산에서 비비탄이나 쏘지 말고 다른 걸 했다면 어땠을까요? 어린 나이에 일찍이 예능에 투신하여 재능을 뽐내는 예술가가 된다든지, 양질의 교육에 매진해 학자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가끔 공상해봅니다. 비록 비범한 생은 아니지만, 평범한 어른이 된 지금 돌이켜보면 특별할 것 없던 어린 시절 기억들은 하나의 성벽이 되어 저의 내밀한 핵심을 지켜주는 것 같아요. 덕분에 저는 유독 회복 탄력성이 좋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살면서 마주했던 작고 큰 고난을 이겨내고, 쉽게 제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이 되었어요. 온유도 지금 그런 힘을 기르는 중일 것 같아요. 엄마랑 간식을 나눠 먹으며 새들이 하늘을 나는 것을 구경하는 그 순간이 앞으로 이삼십 년 뒤에 어른 온유가 어려운 순간을 마주했을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거라 생각합니다. 




Arnaldo Aldana

식물도 과거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시나요? 물론 온유처럼 엄마와 계절 변화를 지켜보는 산책이나 저처럼 여름에 매미껍데기를 주웠던 것 같은 일화적 기억은 아니지만, 가장 낮은 차원의 ‘절차적 기억'을 한다고 해요. 절차적 기억은 비언어적 기억의 일종으로 외부 자극을 기억하는 감각이랍니다. 쉽게 예를 들면, 파리지옥이 벌레를 잡을 수 있는 것이나 가을밀이 추운 겨울을 지나야 꽃을 피우는 것이 이런 절차적 기억 때문인데요. 과거에 겪은 일을 기억했다가 그 정보를 기반으로 생장 과정에 적응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해요. 이러한 반응은 즉각적이지 않고, 늘 일정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우리는 식물도 기억한다는 것을 쉽게 믿기 어렵죠. 식물들은 외부 스트레스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게놈을 변화 시켜 새로운 DNA 조합을 만들고, 이는 유전적 변이가 되어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이어집니다. 자식들은 세포에 남겨진 부모의 기억을 떠올리며 환경에 적절하고 유연하게 반응합니다. 조금 느리더라도 식물들이 분명 정보를 기억하며 이를 전달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답니다. 이런 현상은 사람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많은 것 같아요. 부모가 상황과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따라 자식의 반응도 함께 결정되는 거니까요. 가은씨 말마따나 육아란 실체 없는 걱정과 불안을 다스리는 부모들의 자기 훈련이자 수행이 맞는 것 같네요.




Annie Spratt
가은씨가 소개해준 책 <잃어버리지 못하는 아이들> 중 ‘달라고 했던 것뿐만 아니라 애초에 달라고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까지 실망하게 된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아무래도 ‘내가 이만큼 원하고 있는데, 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다니. 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분명해!’ 이런 생각일까요. 생각해보면 다양한 관계에서 이런 경우가 많네요. 부모와 자식, 연인 관계에서도 이런 문제로 빈번하게 싸우잖아요. 상대의 ‘나에 대한 사랑과 관심'에 의심이 든다면, 기억을 뒤적거려봐야겠어요. 분명 지금의 실망을 비웃을만한 빛나는 순간들이 많았을 테니까요.

이번 편지에는 유독 사랑에 대한 사색이 많이 담겨있어 읽고 나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사랑은 제 인생 주제라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거든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가은씨와 다양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나눠보고 싶어요. 상대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결국 모든 사랑은 질문에서 태어나는 걸까요. 상대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만큼 그 사람을 더 자세히 알아가는 방법도 없으니까요. ‘이런 행동을 하는 걸 보면 이런 사람이겠구나.’라고 임의로 속단하기보다는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 걸까에 대해 조금 더 궁금해한다면, 우리는 사랑의 계단을 오를 수 있을까요? 분명 이런 방법은 식물을 키울 때도 꽤 도움이 되긴 해요. 식물을 돌보면서 생기는 여러 궁금증을 노트에 적었다가, 여유가 될 때 해답을 적어 놓고 나만의 식물관찰 책을 만들면 원예 지식을 정말 빠르게 쌓을 수 있거든요. 앞으로 제 노트에는 ‘진실한 식물 사랑'이라고 이름을 붙여야겠어요.



8월 11일

혜성 드림






글 | 문혜성 goldpricepergram@gmail.com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만 집착한 나머지 어느 한 곳에 마음 두지 못하고 주변부를 맴도는 삶을 살았습니다. 쉽게 변덕 부리며 늘 새로움을 갱신하여 주니어 인생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좌절한 적이 있으나, 어쩔 수 없는 팔자라고 받아들이고 ‘성장은 팔순까지’를 목표로 살고 있습니다. 콘텐츠 기획과 마케팅을 업으로 ‘이직의 아이콘’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10년 동안 10개 넘는 조직을 넘나들며 일했습니다. 가장 최근엔 쉽게 퇴사가 어려운 동업을 시작하여 ‘씨드키퍼’란 이름으로 주어진 공간에서 자연과 가깝게 지내는 다양한 방법을 소개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편집 | 씨드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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